Second Man — 두 번째 자리에서 자기 길을 걷는다는 것

Bob Iger의 경험, 나의 경험, 그리고 Entrepreneurship

조직에서 Top은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바로 옆에는 늘 누군가가 있다. 중요한 결정을 함께 고민하고, 조직을 움직이고, 때로는 Top을 대신해 책임져야 하는 사람.

나는 그 자리를 Second Man이라고 부르고 싶다.

Second Man은 생각보다 어려운 자리다.

위에는 Top이 있고, 아래에는 나를 바라보는 조직원들이 있다. 옆에는 동료가 있고 때로는 경쟁자도 있다. Successor로 거론되기 시작하면 상하좌우를 모두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Second Man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Bob Iger의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았던 이유

Robert A. Iger
Photo source: The Walt Disney Company

Bob Iger는 2000년부터 2005년까지 Walt Disney Company의 President & COO로 Michael Eisner CEO 아래에서 일했다. 2005년 Disney 이사회는 내부와 외부 후보를 검토한 승계 절차를 거쳐 Iger를 차기 CEO로 선임했다.

그가 Second Man으로 있었던 시간은 순탄한 기다림만은 아니었다.

훗날 Iger가 자신의 경영 인생과 그 시절의 경험을 회고한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는 유난히 마음이 갔다.

Iger의 회고록을 다시 펼쳐보면 흥미롭게도 Chapter 5의 제목이 “Second in Line”이다.
CEO가 되기 전, Michael Eisner 아래에서 President & COO로 일하던 시기의 이야기가 바로 이 장에 담겨 있다.

나 역시 시기는 다르지만, Iger가 한 사람의 Top 아래에서 Second Man으로 일했던 것과 비슷한 기간 동안 한 사람의 Top 아래에서 Vice로 일했다.

물론 조직의 구조는 달랐다.

Disney에서는 이사회가 CEO 승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내가 일했던 글로벌 기업에서는 본사 Management와 여러 조직이 연결된 Matrix Organization 안에서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조직의 형태를 넘어 Second Man이라는 자리에서 사람이 겪는 고민에는 놀랄 만큼 닮은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Top에게도 Second Man은 어려운 존재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Top의 입장도 생각하게 된다.

Top에게는 능력 있는 Second Man이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면서도 조직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중요한 일을 맡기면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때로는 Top이 미처 보지 못한 곳까지 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Second Man이 성장하고 조직 안에서 영향력이 커지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언제나 단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지원과 경계가 함께 존재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Top에게는 Top의 책임과 판단이 있고, Second Man에게는 Second Man의 책임과 판단이 있다.

조직에는 그런 긴장이 존재한다.

Iger 역시 Eisner와 함께 Disney를 운영하며 그런 시간을 지나갔다. 그리고 2005년 Disney 이사회는 긴 승계 절차 끝에 그를 CEO로 선택했다. Disney가 당시 발표한 자료에서도 Iger가 President & COO로서 회사의 성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Second Man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결과가 결정되기 전까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Top만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기 길을 잃는다

Second Man이 Successor로 거론되기 시작하면 자칫 모든 관심이 위로 향할 수 있다.

Top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본사에서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다음 자리는 누구에게 갈까?

하지만 그런 질문에 매달리는 순간 오히려 자기 자신이 작아질 수 있다.

나 역시 여러 상황을 겪었다.

Top의 확실한 지원을 받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때로는 침묵해야 했고, 때로는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판단을 걸고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었다.

때로는 가슴에 품고 있던 사표를 내놓을 각오로 자신의 판단을 이야기해야 하는 자리, 그것 또한 Second Man의 자리였다.

그런 시간을 지나면서 내가 붙잡았던 것은 Position이 아니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 질문이었다.


남보다 한 발 앞서 생각한다는 것

나는 Top이 되기 위해 일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남보다 한 발 앞서 생각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Speed 있게 의사결정을 하고, 아직 보이지 않는 가치를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가치를 발전시키고 Continuous Improvement를 통해 결국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지켜준 힘이기도 했다.

직책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가치를 발견하고, 무엇을 발전시키고, 무엇을 현실로 만들어내는지가 나를 규정했다.

나는 그것을 Entrepreneurship이라고 생각한다.

Entrepreneurship — Discovering value, developing it, and making it happen.

Entrepreneurship은 창업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위에 또 다른 의사결정자가 있는 Second Man에게 더욱 필요한 힘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Second Man, 풍도

Second Man을 생각하다 보면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이 떠오른다.

중국 오대십국 시대의 풍도(馮道)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왕조와 군주가 끊임없이 바뀌었다. 그런데 풍도는 여러 왕조와 군주를 거치면서도 오랫동안 고위직을 유지했다. 사료에 따라 왕조와 군주의 계산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신오대사』는 그가 네 왕조와 열 명의 군주를 섬겼다고 기록하고, 『구오대사』는 네 왕조를 거치며 세 차례 중서에 들어가 20년 넘게 재상으로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래서 후대의 평가는 엇갈렸다.

한 군주와 왕조에 끝까지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혼란한 시대를 지나며 행정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했던 관료의 모습도 기록되어 있다. 『구오대사』 역시 그의 절제와 대신으로서의 품격을 평가하면서도 여러 왕조를 섬긴 충절의 문제를 동시에 제기한다.

그래서 풍도를 단순히 ‘가늘고 길게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풍도는 나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Second Man에게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남는 것과 자기 길을 걷는 것

풍도도 살아남았다.

Iger도 긴 Second Man의 시간을 지나 결국 Top의 자리에 올랐다.

나 역시 오랜 조직생활 속에서 여러 자리를 지나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자리를 지켰느냐가 아닐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지켰는가.
그리고 어떤 가치를 만들어냈는가.

인생이란 어쩌면 시련이 있어야 할 말도 생기는 법이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보다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더 많이 들여다보게 된다.

지원받을 때보다 지원받지 못할 때 자신의 실력을 더 시험받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내 생각에 동의할 때보다 혼자서 판단해야 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시간이 쌓여 한 사람의 경험이 되고, 결국 그 사람만의 경영 철학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Second Man의 목표는 Top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돌아보면 Second Man에게 위험한 순간이 실패했을 때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Top이 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는 순간도 위험할 수 있다.

그때부터 사람의 시선은 위로 향한다.

누가 나를 평가하는가.

누가 나를 지지하는가.

누가 나의 경쟁자인가.

그러나 Entrepreneurship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어디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치가 있는가.

무엇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가.

지금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가.

어떻게 더 빠르게 실행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가.

Position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Value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Second Man의 자리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Position이 아니라 Value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Second Man의 시간은 단순히 Top으로 가기 위한 준비기간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과정이었다.

사람을 배웠고, 조직을 배웠고,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침묵하는 법을 배웠고, 때로는 자신의 판단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무엇보다 Position과 상관없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한다.

Second Man의 목표는 Top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남보다 한 발 앞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발전시키고, 실행하고, Continuous Improvement를 통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그러다 어느 날 Top의 자리에 서게 된다면,

그것은 목적이라기보다 결과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Entrepreneurship이라고 부르고 싶다.